김경호 사경장(가운데)을 만난 어린이 손정윤 양(오른쪽)과 김나윤 양.

‘1㎜의 예술’이라 불리는 사경은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다. 불교 경전을 베끼는 일 또는 베낀 경전을 사경이라고 한다. 사경장은 불교 경전을 따라 쓰고 핵심이 되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장’을 제작하는 장인이다. 0.1㎜의 섬세한 붓끝으로 1㎜ 공간에 5개 이상의 선을 그려 넣으며 불교의 뜻을 전하는 사경장은 일반적인 베껴 쓰기와는 비교가 불가한 경지에 이른 예술가다.

문화재청은 최근 사경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신규 종목으로 지정했다. 고려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맥이 끊겼던 사경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화를 시도 중인 김경호 사경장은 1호 보유자로 인정됐다. 어린이 손정윤 양(서울 서대문구 서울연희초 5)과 김나윤 양(서울 서초구 서울반원초 4)이 사경에 얽힌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고 그 아름다움을 엿보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김 사경장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 사경장이 손 양과 김 양에게 사경 작품에 등장하는 불교 상징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임감 갖고 사경 알려요

“인간문화재가 됐으니 두 어깨가 무겁지요. 우리나라 사경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손 양이 국가무형문화재 1호 보유자가 된 소감을 묻자 김 사경장은 이 같이 답했다. 그는 “사경은 과거 우리나라가 형님처럼 모셨던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었음을 증명하는 몇 안 되는 분야”라며 “고려의 뛰어난 사경 기술을 본받고 싶었던 중국이 수 백 명씩 장인들을 데려가 사경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사경장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사경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불교를 국교(법으로 정한 종교)로 정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사경장은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들은 불교문화를 억압했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사찰에서 몰래 사경을 제작하긴 했지만 후기에 이르며 거의 자취를 감췄다. 김 사경장은 “찬란했던 고려 사경의 명맥을 잇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 결과가 빛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에 사경을 하는 사찰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스승 없이 스스로 공부해야 한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5세 무렵부터 붓을 잡고 서예를 쓰기 시작한 김 사경장은 중학생 때 우연히 본 사경 작품의 깊이에 매료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경장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그는 “조계종(1962년 출범한 한국 불교 종파)이 개최한 제1회 불교사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며 “신문기자, 시인 등 여러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손 양과 김 양이 돋보기로 탑에 새겨진 글자를 읽고 있다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 그렸다고?

“세로 6㎝, 가로 1㎝ 크기의 탑 한 개를 그리는 데만 꼬박 2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제 작품 중 가장 정교한 것으로 꼽히죠.”

김 양이 “사경장님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김 사경장은 ‘감지금니7층보탑 법화경견보탑품’을 꼽았다. 7층짜리 탑의 각 칸마다 부처의 말씀을 한 자씩 새겨 총 460기의 탑을 그려 완성한 사경 작품이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신성한 건축물이다. 원본 경전에 나오는 한자의 음을 한글로 썼다. 한지 위에 그린 작품을 다 펼치면 663㎝에 달한다. 그는 “하루 8시간씩 꼬박 8개월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1㎜ 안에 5획을 그려 넣으려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찰나도 엄청나게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 사경장이 제작한 ‘감지금니7층보탑 법화경견보탑품’의 영인본

감지는 남색 종이를 금니는 아교(풀처럼 끈끈한 물질)에 개어 만든 금박 가루를 뜻한다. 붓끝에 금을 묻혀 잉크 삼아 써내려간 글씨를 실제로 보면 번쩍번쩍한 느낌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날 영인본(원본을 복제한 인쇄물)을 접한 어린이들은 “돋보기로 보아야 작품의 진가를 알 수 있다”며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 그렸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 사경장이 금니를 이용해 불교 경전을 베껴쓰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삼고초려의 정신.’ 세 번 찾아가서 사정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게 김 사경장이 지론이다. 그는 “고려의 사경을 뛰어넘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원본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봐야만 하겠더라”며 “전국의 박물관, 사찰, 개인 소장자를 찾아가며 실물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쓰인 은자대장경을 보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꿈을 향해 돌진하는 청년의 집념을 꺾기는 어려웠겠죠? 한 분야에서 최초이자 최고가 되기까지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후대에 제가 배운 모든 것을 전승하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합니다.”